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르데냐 왕국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사르데냐 왕국의 존재는 14세기로 거슬러가지만, [[교황]]이 [[사르데냐]]에 간섭하기 위해 만든 괴뢰왕국이라 [[아라곤 왕국]]이 교황의 허락을 받고 사르데냐를 정복한 이래로 사르데냐 왕은 아라곤 왕, 나중에는 [[스페인 국왕]]이 겸하는 작위에 불과했다.[* 사르데냐를 상실한 지 300여년이 지난 현재도, 스페인 국왕은 명목상의 사르데냐 국왕 칭호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. 스페인 왕실은 과거에 보유했던 작위를 현재 상태와 무관하게 칭호로 계속 사용하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.]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에서 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]] 대동맹 측에 가담한 사보이아 공작 [[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]]는 1714년, [[위트레흐트 조약]]의 결과 [[스페인]]이 지배하던 [[시칠리아]]를 얻는 데 성공하였으나 1718년, 이탈리아 영토를 탈환하려한 스페인에게 시칠리아를 빼앗겼다. 이로 인해 [[사국 동맹 전쟁]]이 발발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의 도움으로 시칠리아를 되찾았으나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사르데냐를 다스리기 어려워한 [[카를 6세]]의 제안[* 제안이라고 하지만 국력차를 앞세운 반협박에 가까웠다.]으로 1720년, 시칠리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였다.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가 자신의 대표 작위를 새로 획득한 사르데냐 국왕으로 바꾸면서 사르데냐 왕국은 주권국이 되었으나, 실제 왕국의 중심지는 사보이아 가문이 머무르는 [[피에몬테]]였다.[* 사보이아 가문은 사르데냐에 관심이 없었고 국왕의 방문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. [[이탈리아어]]가 사르데냐의 공식어로 지정된 것도 1760년이 되어서였다.] 이후 [[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]]는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교묘한 중립 정책을 펼쳐 영토를 점진적으로 넓혀갔다. 1733년에는 [[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]]에서 프랑스 편을, 1740년에는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에서 오스트리아의 편을 들어 참전하였고 1748년, [[아헨|엑스라샤펠]] 강화조약으로 [[밀라노]] 코앞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사르데냐 왕국을 오스트리아, 스페인과 함께 이탈리아를 3등분해서 세력을 나눠 갖는 국가로까지 발전시켰다. 1792년, [[프랑스 혁명 전쟁]]이 발발하자 [[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]]는 1차 대불동맹에 참여했지만, 1796년에 [[나폴레옹]]의 침입을 받아 주요 항구 도시 [[니스|니차]]와 왕실의 본관인 [[사보이아]]를 빼앗기고 말았다.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1799년, [[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]]는 왕국의 중심지였던 [[피에몬테]]까지 빼앗겼고 왕실은 사르데냐로 몽진했다. 다만 사르데냐는 [[나폴레옹 전쟁]] 기간 중 함락되지 않았고, 형의 퇴위로 즉위한 [[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]]가 제5차 대불동맹, 제6차 대불동맹에 참가하여 나폴레옹에 계속 저항한 끝에 1814년, 제1차 [[파리 조약]]으로 잃었던 영토를 모두 되찾았다. 이듬해 개최된 [[빈 회의]]에서 옛 [[제노바 공화국]]의 영토였던 [[리구리아]] 지방을 얻어냈으며, 왕국의 이름도 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(Regno di Sardegna-Piemonte)으로 개칭하였다. 1847년, 국왕 [[카를로 알베르토]]는 연합법(Fusione perfetta del 1847)을 통해 사르데냐 왕국, 사보이아 공국, 피에몬테 영주국, [[발레다오스타|아오스타 공국]], 니차 백국, 몬페라토 공국, 제노바 공국[* 나폴레옹 전쟁 이후 획득] 등 명목상 별개였던[* 1815년 [[빈 체제|빈 조약]]에서 이 영토들은 '''샤르데나 국왕의 영토'''라 칭해졌다. 근대적 국민국가와 국왕 개인의 재산으로서의 중세적 국가관이 아직 병립했음을 보여준다.]사보이아 왕가의 영토를 통합하여 행정구역을 재편하였으며, 이듬해 [[1848년 혁명]]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새 헌법인 알베르토 헌법(Statuto Albertino)을 채택하였다. 새 헌법은 군대 지휘권과 행정 최종 결정은 왕에게, [[입법권]]은 상,하원 의회에 부여하고 국민의 [[기본권]]을 규정하였으며, 이 때를 기점으로 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은 입헌군주국이 되었다. 19세기 중반 [[프랑스 제2제국|프랑스]]-[[오스트리아 제국|오스트리아]]-[[프로이센 왕국|프로이센]]의 역학관계를 이용한 능수능란한 외교술로 국익을 극대화 했다.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당시 프랑스 황제 [[나폴레옹 3세]]의 적극적인 지원을 끌어냈고, 이후 나폴레옹 3세의 변덕으로 적대관계에 놓일 상황에 처했지만, 중요 항구도시 니차와 왕실의 본관 사보이아를 내어주는 조건을 제시하여 [[토스카나 대공국]], [[모데나 공국]], [[파르마 공국]], [[교황령]] 중부의 [[볼로냐]], [[라벤나]] 등 중부 이탈리아를 통합할 수 있었다. 그리고 [[프로이센-오스트리아 전쟁]]에서 [[프로이센 왕국]]을 지원하여 [[베네토]] 지방까지 확보하였다. 이후 [[이탈리아 통일전쟁]]의 주축이 되어 [[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]] 국왕과 [[카밀로 카보우르]], [[주세페 가리발디]] 등의 활약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, 국명을 [[이탈리아 왕국]]으로 바꾸었다. 자세한 내막은 [[이탈리아 통일]]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. 통일 이후에도 사르데냐 왕국의 영향력은 남아 있었다. 사르데냐 왕국의 십자가 문장은 통일 [[이탈리아 왕국]]의 문장이 되었으며, 2002년 [[유로화]] 도입 전까지 이탈리아의 법정 화폐였던 [[이탈리아 리라]]도 사르데냐 왕국의 통화였던 사르데냐 리라(Sardinian lira)에서 이어진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